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립 마운트배튼 (문단 편집) ==== 가문의 몰락과 [[망명]] ==== [[1922년]] [[9월 27일]],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가 참패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콘스탄티노스 1세]]는 2번째 퇴위를 했으며, 대중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였던 고위층과 장군들은 짧은 재판 후 [[사형]]당했다. 전쟁에서 고위 사령관이었던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 역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받은 7명 중에 안드레아스 왕자만이 목숨을 건졌다.(1명은 종신형.) [[https://en.m.wikipedia.org/wiki/Trial_of_the_Six|Trial of Six]]] 이런 급박한 상황에 안드레아스 일가와 친척들은 여러 곳에 닥치는 대로 도움을 청했으며, 필리포스의 외가였던 바텐베르크 공가는 [[영국 총리]]에게 로비했고 [[조지 5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영국 외무부 장관 조지 커즌은 영국 정보부 요원 제럴드 타블롯을 보내 안드레아스 왕자의 처벌에 대해 신(新) 정권의 지도자들과 협상하게 했는데, 그 결과 다행히도 안드레아스 왕자의 사형은 면했지만 그들 일가에게 추방령이 내려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8A22184-1038-4E51-AD0C-04E37DBD2936.jpg|width=100%]]}}} || || '''생후 12개월의 필리포스'''[* 남자아이임에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유는 당시의 배변 훈련 문화 때문. 옛날에는 바지는 입히고 벗기며 [[기저귀]]를 갈아주기에 번거로워서, 남자아이에게도 치마를 입혔다고 전해진다. 훗날 자신의 맏아들 [[찰스 3세]]에게도 이런 드레스를 입히고 안아주는 사진이 남아있다.] || 누나 소피아에 따르면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교황, [[조지 5세]] 등이 도와주려했다고 한다. 결국 [[조지 5세]]는 [[러시아 혁명|같은 실수]]를[* [[조지 5세]]는 [[러시아 혁명]] 당시 앨리스 왕자비의 이모이자 자신의 사촌동생인 [[헤센의 알릭스|알렉산드라 황후]]와 [[니콜라이 2세]]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 의사를 타진한 것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 [[적백내전|그들을 죽게 만든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영국 [[경순양함]] 칼립소(HMS Calypso)를 급파해 이들을 구출하도록 했다. 고용인 6명[* 앨리스 왕자비의 [[시녀]], 아이들의 [[가정교사]], [[유모]] 등]도 안드레아스 일가의 뒤를 따랐으며, 승선은 군중들이 모여들까 비밀리에 진행됐지만 몇몇은 안드레아스 왕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첫 날 안드레아스 왕자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앨리스 왕자비]]가 배에 오른 후, 그 다음날에 [[코르푸]]에 있는 궁으로 가 아이들을 데려왔다. 필리포스의 넷째 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1914)|소피아 공주]]는 "당시 일은 끔찍했고 혼란 그 자체"라고 회고했으며, 떠나기 전 언니들인 마르가리타 공주와 테오도라 공주가 자신들의 모든 문서와 편지를 태워서 "수십년이 지났어도 몬 레포스에서의 연기 냄새를 기억한다"고 했다. 짐을 챙긴 후 차로 이동하고 작은 배에 올라 군함까지 가서야 승선할 수 있었으며, 당시 생후 15개월이던 필리포스는 항해 내내 과일 상자로 만든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처음에 [[영국]]으로 가고 싶어했으나, 이는 영국 외교부와 [[조지 5세]]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 [[브린디시]][* 노년의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1914)|소피아 공주]]는 이제까지 살면서 가본 최악의 장소라고 평했다.]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수도인 [[로마]]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필리포스는 기차 여기저기를 기어다니고 창문을 핥으며 놀았다고 한다.[* 앨리스 왕자비는 멈추려고 했지만, [[유모]]는 필리포스를 가만히 놔두라고 했다.] [[로마]]에 도착한 안드레아스 일가는 말그대로 돈 한 푼 없었기 때문에 영국대사관에서 돈을 빌려주었고, [[파리(프랑스)|파리]]행 기차표까지 구매해줬다. 나중에 은행가들과 연락이 닿아 재산을 찾은 뒤엔 배고프고 가난한 처지는 아니었으나 재정 상황이 이전에 비해 나빠졌기 때문에 주변 친척과 지인들에게 의존해야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로마에서 필리포스의 백모인 마리 보나파르트 왕자비[*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으로, 성에서 짐작하듯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이다.]가 살고 있는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